5월에 바쁜게 아무래도 끝났기 때문에 6월 초에는 치앙마이로 일주일간 휴가도 떠나고 좀 더 여유로운 한 달을 보냈다. 그 덕에 감사하게도 밀린 책을 실컷 읽을 수 있었다.
한병철 <피로사회> : 현대 사회인의 신경증 진단서
간만에 철학책을 읽으면서 법열의 기쁨을 느끼고 미친듯이 줄을 치며 읽었다. 한병철씨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한국사람도 읽다보면 정말 깊은 공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의 뿌리깊은 '자기착취'와 무한한 '긍정' -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가 어떻게 우리를 불안, 우울, 번아웃으로 몰아가는지를 정말 논리적으로 설파한다.
특히나 요즘 많이 느꼈던 부분이다. 나를 포함한 내 주위 전문직 친구들을 보면 자기착취를 굉장히 잘 해서 여기까지 해낸 경우가 많다. 그래도 고시까지는 어떻게든 끝내면 되니까 버티고 버텨서 해내는데, 문제는 직업인으로서 전문직으로 살다보면서 발생한다. 고시처럼 명확한 끝이 없기 때문에 무한한 자기착취의 굴레에 들어가게 되고 끝없는 불안을 겪으면서 공황장애까지 걸리는 경우를 봤다. 네이버에 전문직 공황장애라고 치면 꽤 많은 검색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그걸 보면서 그리고 직접 겪으면서 느낀 것은 시험에 합격 할 수 있게 도와준 성격적 특징인 강박성, 무한 긍정, 자기착취가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점에서 정신적 위기를 재작년말과 작년에 겪었다. 그 이후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면서 내린 결론은 삶에서 다양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항상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것(당연한 말이다), 그리고 어느정도는 심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심심한 삶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하고 싶은데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정보 과잉이 심한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지 생각보다 사람들이 잘 모른다. 하루키 책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루키 작품이나 에세이에서 나오는 삶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어찌나 정성스럽게 그리고 평온하고 정갈하게 사는지 그런 부분을 읽을 때마다 명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거기서 위안을 정말 많이 얻는다.
전문가로서 그리고 사업가로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새로운 컨설팅 기법, 새로운 법률, 그리고 새로운 마케팅 및 영업 방식, 직원들 동향 등을 살피다보면 진이 다 빠지게 된다. 그리고 쉴 때마저 숏폼을 소비하면서 1시간이면 다 잊힐 중요하지도 않은 정보들을 긁어모은다. 그리고 누가 얼마를 벌었다더라, 누가 어떤 사람을 영업했다더라 이런 말들에 휘둘린다. 이런 것들이 물론 어느정도는 알아야 하지만 요즘 느낀건 1년안에 바뀌어버릴 그런 걸 좀 모른다고 해서 아주 큰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AI가 미친듯이 발전하는 세상이지만 아날로그적으로 종이책을 읽는 사람들도 자기 나름 할 일이 결국 있더라. 그리고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그렇게 많이 그러쥐고 끊임없이 다 알려고 하는 것도 부질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 진짜 창조는 빈 공간에서 나온다. 세상이 인정하는 좋은 음악(클래식)을 듣고 고전 소설을 읽고 일기를 쓰면서 살아도 좋은 삶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나오는 핫한 가수들을 다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요즘 유행하는 쇼츠나 릴스를 다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나에게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 오리지널의 나로서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철학자 한병철도 책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멀티태스킹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동물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습성이다. 먹이를 먹으며 경쟁자를 보고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새끼를 감시하고 짝짓기 상대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 수렵자유구역에 사는 동물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라고 하며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깊은 심심함을 허용하애 한다고 한다.
사색적인 삶,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 긴 것 , 느린 것에 대한 접근은 오랫동안 머무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사색적인 삶. 내가 가장 추구하는 삶에 가깝다. 어렸을 때부터 나만의 공간, 특히 나만의 서재를 갖고 싶었다. 하루키 책에서도 꼭 등장하는 공간인데 아름답고 포근한 인테리어와 고전을 다수 포함하는 장서들 그리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장치와 편안한 소파. 나도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자유롭고 평온하게 부유하며 보낼 수 있는 일상들.
또 기막힌 통찰을 보여준 부분은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어리석다는 구절이었다.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다. 그렇다. 위대한 전환을 위해서는 중단하는 본능이 필요하다. 나도 이 부분을 나름 잘(?) 해왔다고 생각한다. 성악을 하다가 스페인어를 하고 그러다가 세무사가 된 것도 그 사이사이에 있던 깊은 심심함의 시간과 그로 인한 사색, 그리고 중단하는 본능 덕이었다. 반드시 이렇게 전환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나의 경우 이런 식의 전환은 늘 나를 성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해결책인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의 경우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세상을 신뢰하는 피로라는 것은 피로한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는, 무위와 태평함 평화의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것 같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인터뷰에서 굉장히 인상깊었던 본인은 무위, 빈둥거림, 태평히 부유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던 구절이 오버랩되었다.
한병철 피로사회를 읽으면서 굉장히 깊은 위로를 받았다. 마침 또 요즘 많이 느끼고 있던 부분이기 때문에 더더욱 물입해서 편 자리에서 한번에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잘 생각하고 나를 위해서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응원을 받은 기분도 들었다. 불안하고 지친 현대인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특히나 자기 착취가 심한 한국 사회의 사람들은 꼭 읽어보길 권한다.
평생 매트릭스 안에서만 살 수는 없지 않을까? 가끔은 빨간 약을 한번 먹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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